모델처럼 날씬했던 여주인공 미미는 애인이 유학을 떠난 동안 외로움과 호르몬 불균형으로 인한 폭식증에
빠져 걷잡을 수 없게 체중이 불어났다. 애인은 피아니스트로 성공해 귀국했지만 미미는 그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가슴만 태운다. 애인이 떠나기 전 혹시 연락이 끊기면 만나기로 했던 날이 6개월 앞으로 다가오자
미미는 좌절하는데, 이때 미미처럼 심하게 ‘후덕한’ 남자 주인공 비기(포스터 속 남자가 홍콩의 스타 유덕화
라는게 믿기지 않는다)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비기는 그녀의 사연을 듣고 다이어트 트레이너 겸 스폰서를
자처하고 나선다. 우여곡절 끝에 옛 모습으로 돌아 간 미미는 애인과 멋지게 조우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결말에 대한 힌트는 영화 제목 속에 담겨있다.
비만은 영화 속에서 사랑을 가로막는 막강한 힘을 휘두르고, 현실에서도 필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적지않은 고통을 주기에 이제는 우리사회의 담론들 중 하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체중감량 비즈니스를 거
대산업으로 자리잡게 만들었다. 더 이상 과거처럼 비만을 탐식의 결과로만 이해하는 것은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에 필자는 개인사를 소개하면서 비만에 대해 좀 더 근원적인 접근을 해보고자 한다.
명칭부터 살펴보면, ‘살이 쪄서 차있다’라는 뜻을 가진 즉 현상의 결과에 초점을 맞춘 용어인 비만(肥滿)은
너무 피상적으로 느껴진다. 그보다는 현상의 원인 혹은 현상자체를 표현하는 ‘불균형(不均衡)’이라는 용어
가 더 나을 듯 싶다. 왜냐하면 그 후덕함의 내면에는 몸과 마음의 균형 혹은 조화가 깨진 상태를 적나라하게
관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시각이 비만문제의 해결에 더 도움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필자는 조부모님의 사랑에 힘입어 과식을 생활화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후 신체 불균형의 견실
한 토대가 되었다. 학창시절에는 선생님 말씀 잘 듣는 모범생이 되기 위해 운동과 같은 ‘쓸데없는 짓’은 애
써 피하며 조용히 책상머리에 앉아 있었다. 이때는 최소한의 음식을 섭취했다 할지라도 그 보다 더 적게 칼
로리를 소모하는 재주를 부려 어린 시절 체화시킨 불균형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사회에 나와서는 ‘밥이
든 술이든 잘 먹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라는 선배들의 조언을 명심하며 매일 할당된 시간에 업소의 정성어
린 음식물을 몸 속에 공급해주었다. 그뿐이랴. 사교모임에서도 ‘먹는 노동’을 성실히 수행했는데 어쩌다 적
게 먹으면 주위 분들이 어찌나 걱정을 해주는지 그것이 신경쓰여 될 수 있으면 그런 행동을 삼갔다. 몸과 마
음의 균형보다는 사회에서 요구한대로 목표지향적 삶을 살았다고 표현하면 맞을 듯 싶다.
남 탓하지 않을 나이가 된 지금 예전만큼 고단한 과식에 내몰리고 있지는 않지만 수 십여년에 걸쳐 완성된
불균형의 회로와 그 결과물들을 되돌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한 때 유행했던 다이어트법을
통해 체중 10kg을 뺀 적이 있고, 지금도 결심만 하면 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
으로는 부족할 듯 싶다. 내 자신의 경험을 소개한 이유도 비만을 단순히 내 탓 또는 남 탓으로 돌리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불균형의 늪에 빠뜨리는 이 사회의 동력에 대해 말하고 싶었기 때
문이다.
부단히 달려가고 있는 이 사회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 전반의 동력은 과연 개인의 행복을 지향하
고 있을까? 조화로운 몸과 마음이 가져다주는 행복의 가치를 알기는 할까? 경쟁이 미덕인 이 사회에서 가정
교육이, 학교교육이, 국가의 정치가 진실로 자식의, 학생의, 국민의 행복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있지는 않은
듯 싶다. 필자의 이야기가 조금 사회학적으로 빗겨가고 있는데,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지금 얘기하고
있는 신체적 비만에 더하여 다른 형태의 비만들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생각 속에는 특정대상에 대한 중
독이라는 비만이, 삶에서는 명예욕과 물욕이라는 비만이, 공동체에서는 집단 이기주의 혹은 무한경쟁이라
는 비만이 기세등등하게 존재하고 있다. 과도한 자원개발도 인류의 비만 중 한 예가 될 것이다. 단, 개인적
비만이든 사회적 비만이든 그 뿌리가 불균형에 있음은 공통적인 현상으로 그에 대한 해결책도 동일한 맥락
에서 고려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싶다. 일찍이 동양고전인 ‘중용’에서 그리고 서양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론(德論)에서 왜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한’의 의미를 가진 개념인 ‘중
용’을 강조했는지 비만인들이 넘치는 현대사회에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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