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기 황윤숙 교수 (호주 GRIFFITH 대학) 세계 100회 강연 덕분이다.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남녘 땅인 호주 브리스번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11월 29일 그리피스 대학교 강단에 서신 스님의 표정엔 대륙과 나라를 쉴새없이 오가는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웃음과 여유가 어렸다. 브리스번에서 살아 온 지난 몇 해 동안 이 많은 인원의 교민들이, 그것도 종교와 나이가 다른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며 함께 울고 웃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다. 사람 사는 데 어려움이야 어디를 가던 있을 터다. 하지만 낯 설고 물 설을 뿐 아니라, 말 설고 문화 설은 이 곳에서 녹록치 않았던 교민들의 삶이 그들의 질문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스님의 명쾌한 답변은 때로는 허를 찌르는 질문이 되어 질문자들에게 되돌아왔다. “스님, 장애를 가진 게 과연 과거의 잘못된 업보로 인한 것입니까?” 6년 전 네팔의 한 명상센터에서 버마에서 오신 우 판디타 큰스님께 여쭸다. 당시 아흔을 앞둔 노스님은 필자의 눈을 한참 보시더니 이렇게 물으셨다. “논에 해충이 많다. 그대로 두면 벼농사를 망하게 해 배고픈 사람들이 굶주리게 된다. 해충을 잡아 죽이겠느냐. 사람들을 굶어 죽도록 내버려두겠느냐?” 살생을 하지 말라는 첫 번째 계율이 떠올라 말문이 막혔다. 큰스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사람 몸에 중병을 일으키는 균이 있다. 항생제를 먹어 균을 죽이겠느냐. 안 먹고 네 몸을 병들어 죽게 만들겠느냐?” 그제서야 알았다. 스님께서는 “행동의 의도”를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논의 해충을 잡거나 항생제를 먹는 행동이 해충과 병균에 대한 미움 때문에 죽이려는 것인지 아니면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을 살리려는 것인지.
‘카르마’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업보’가 아니다. ‘행동’이다. 만약 누군가가 ‘카르마’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낼 수 없는 타인의 과거 사안에 집착하기 보다, 지금 내가 어떤 의도로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들여다 봐야 한다는 의미일게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노스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셨다. “앞으로 장애인들을 대하는 네 행동이 그들이 겪는 고통을 봐야 하는 네 자신의 괴로움을 없애고자 하는 데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진정 그들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에 기인한 것인지를 항상 살피거라.” 두시간 반 가량 이어진 즉문즉설을 마치며 법륜스님께서 마태복음 7장을 인용해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셨다. “남의 눈의 티를 보기 전에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보세요”. 참 많이 닮아있다.
그림 설명: 두리(가명)의 자화상. 필자가 두리와 인터뷰할 때 친구의 이름을 물었더니 두리는 “하나님 이요”하고 대답했다. 친구인 하나님과 같이 있을 때 무엇을 하냐고 물었더니 “칭찬”이라고 나즈막히 말했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두리는 우리나라에 있는 정서자폐학생들을 위한 특수학교의 고등부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림 출처: Hwang, Y-S. (2014). Miss Mum: Mind and affective experience of Korean learners identified with autism spectrum and cognitive difficulties. Disability & Society, DOI: 10.1080/09687599.2014.9584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