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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칼럼-황윤숙] 장애인에 대한 국가적 책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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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20-07-16 오전 9:45:00 |
장애인에 대한 국가적 책무
글쓴이 : 황윤숙교수(호주 그리피스대학 특수교육과)
2004년. 호주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인터넷 연결에만도 2주일은 족히 걸리고, 수화기 들고 삼십분 이상은 기다려야 겨우 통신사 직원과 통화 연결이 되는 “느리디 느린” 상황을 참아내는 게 다른 언어와 문화에 적응하는 것 못지 않게 답답하고 고통스럽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학교로 향하던 길에 휠체어를 탄 사람이 버스 정류장에 있는 걸 보았다. 버스가 도착했고, 휠체어 램프가 내려졌다. 휠체어를 움직여 버스에 탈 채비를 하던 그의 행동은 “느렸다”. 4차선 도로 주변을 조깅하던 한 사람이 갑자기 멈춰서 그를 돕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행인이 동참했다. 버스 운전기사는 바쁠 게 없다는 듯 그가 버스에 오르기를 기다렸고, 한참 만에 그를 태운 버스는 유유히 사라졌다. 조깅을 하던 사람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고, 행인은 가던 길을 재촉했다. 특수 교사로 일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 있던 저자는 휠체어에 타고 있던 그를 못본채 지나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가 버스 타는 걸 돕겠다고 서투른 영어로 말할 자신도 없어 엉거주춤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느려도 괜찮다고 우리 아이들에게 말로만 주입하던 난 정작 느려도 괜찮음을 몸소 보여준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서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2008년 2월 13일 오전 9시. 온 나라의 눈과 귀가 국회가 있는 캔버라에 쏠려 있었다. 새로 선출된 노동당 국무총리인 케빈 러드는 유럽 백인들이 호주를 점령한 이래 국가 공권력을 사용해 이 땅에서 수천년을 살아온 고유주민들*에게 자행했던 만행을 공식 인정하고 역대 정권을 대신해 사과하는 연설을 했다. 그렇다. 호주에는 어두운 역사가 있다. 아동보호 (child protection)와 동화정책(assimilation policy) 이라는 미명 하에 고유주민 자녀들을 부모에게서 강제로 빼앗아 집단 수용해온 것이 그 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특히 성행했던 백인동화정책은 하루 아침에 잡혀와 이유없이 시설에 수용되거나 백인부모에게 입양된 갈색 눈의 빼앗긴 세대 (stolen generations)를 양산했다. 그렇게 해서 성인이 된 빼앗긴 세대들은 역할 모델의 부재로 그들 자신이 부모가 되고 난 후에도 어떻게 부모 노릇을 해야하는지 알 수 없었고, 빼앗긴 세대의 잔재는 후손들에게 되물림되고 있다. 하루 아침에 황망하게 자식을 잃은 고유주민 부모들의 삶도 힘겨웠던 건 마찬가지다. 자식을 빼앗기며 그들은 희망도 함께 빼앗겼다. 1980년대 들어 헤어졌던 가족들을 다시 연결해주는 서비스 기관이 각 주별로 생겨났지만, 국가 수준에서 자행된 강제분리 및 수용의 여파는 가족 해체를 넘어 공동체 해체까지 초래했다. 어둡고 고된 역사를 반영하듯 최근 발표된 호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고유주민들의 사망률은 비고유 주민들에 비해 1.9배 높고, 평균 수명 역시 10년 정도 짧다. 또한 고유주민들의 인구가 전체 인구에 비해 3% 정도를 차지하지만, 호주 감옥에 수감된 인원의 1/4 이상이 호주 고유주민들이다. 이날 국무총리 러드는 국회 단상에 올라 빼앗긴 세대와 그들의 가족들에게 가족과 공동체를 해체한 것에 대해, 소중한 사람들과 자랑스러운 문화를 능욕한 것에 대해 정중히 사죄했다.
2011년. Productivity Commission은 호주 장애인들이 그들의 최대 역량에 부응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보호와 지원에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올 목적으로National Disability Insurance Scheme (이하 NDIS)이라는 새로운 국가 재정지원 및 지역사회 협력모델을 연방정부에 제출한다. 사회 보장제도 (social security)의 일환으로 실시하는 장애인 맞춤형 개별지원 프로그램인NDIS 도입을 건의하며 당시 노동당 정부는 전체29개 OCED 국가 중 호주가 장애인 고용률 21위를 차지하고, 전체 장애인 인구 중 45%가 빈곤층에 속하거나 이에 근접하는 나라라며 호주의 또 다른 어두운 얼굴을 공개한다. 공정 (fairness)과 촉진(facilitation), 선택 (choice)과 통합 (inclusion)을 화두로 한 NDIS는 장애인들이 호주 사회구성원으로서 비장애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고, 사회경제적 활동에 참여함은 물론 사회구성원으로서 기여할 수 있도록 지원받아야 마땅함을 명시했다. 또한 장애인의 삶을 증진시키는 것이 전체 호주인들의 책임임을 공고히했다. 이런 틀 안에서 장애인들은 도움을 받는 수혜자가 아닌 맞춤형 개별지원 프로그램의 참가자 (participants)로 분류되었고, 본인과 가족이 원하는 지원과 서비스제공자를 선택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다.
2012년 11월 29일. National Disability Insurance Scheme 법안이 호주 하원의회에 처음 상정되었다. 이듬해 3월 28일 상원의회과 하원의회는 본 법안을 무리없이 통과시키며 장애로 대변되는 힘없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국가의 역할과 책무를 겸허히 수용하는 자세를 보였다. 호주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공동으로 자원을 조달해야 하는 여건상 각 주정부의 재정지원 참여를 이끌어내기까지 NDIS는 나름의 난항을 겪었다. 법안이 상정된지 한 달 이내 재정지원에 동의한 주 (예. New South Wales주, 수도 시드니)가 있는가 하면, 주정부의 빚이 많다는 이유로 연방정부가 모든 재정책임을 지도록 요구하는 주 (예. Queensland주, 수도 브리스번)도 있었지만, 이듬해 5월Western Australia (수도 퍼스)를 끝으로 모든 주(State)정부와 영역(Territory)정부가 공식 절차를 걸쳐 연방정부에서 제안한 NDIS에 재정 공동지원을 약속했다. 이어서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였던 줄리아 길라드는 국회연설을 통해 NDIS가 곧 시행될 것을 발표했다. 본 제도를 통해 장애인들이 “일시적 도움”이 아닌 “영구적 지원”을 받게 될 것이며, 더 이상 “원칙적으로는” 또는 “여건이 허락하는 한” 등과 같은 애매모호한 말을 들으며 희망고문을 당하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알리는 그의 목소리는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느라 스러질듯 떨렸다.
사진설명: 호주 최초 여성 국무총리 줄리아 길라드. 국회에서National Disability Insurance Scheme 시행 발표 후 동료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사진출처: The Sydney Morning Herald (http://media.smh.com.au/news/national-news/there-will-be-no-turning-back-says-gillard-4273727.html)
NDIS 는 점진적으로(“느리게”) 시행될 전망이다. 2013년 7월 Tasmania, South Australia, the Barwon area of Victoria 그리고 the Hunter area in NSW를 필두로 시범 실행에 들어간 NDIS는 2019년 7월이 되어서야 호주 전역에서 골고루 시행될 예정이다. 호주 정부는 해마다 향후 일년 간의 예산안을 국민들에게 발표한다. 예산안이 발표되는 날 저녁이면 사람들은 텔레비젼 앞에 모여 앉아 발표된 예산안이 본인과 본인이 속한 공동체에 미칠 영향에 대해 논의한다. 지난 5월 자유당 정부가 2014-2015 예산안을 발표했다. 그리고 호주 대다수 투표권자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호주인들의 이런 유례없는 즉각적이고 거센 반응은 과거 노동당의 세금정책을 비판하며 집권기간인 향후 3년동안 새로운 세금은 없을 거라고 공언하던 자유당 (국무총리: 토니 에빗)이 일련의 세금을 도입하며 말을 바꾼 것과도 관련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새롭게 발표된 예산안과 추가된 세금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불공정하게 적용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예산안에서NDIS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규제완화를 통해 이윤추구를 극대화하려는 신자유주의적 시각과 대척점에 있는 인간 기본권과 사회보장을 국가의 책무로 보는 NDIS 같은 제도를 앞으로도 지켜내는 일은 “나”를 넘어 공동의 선을 보고, 어두운 과거와 현재를 아프지만 인정하고, 느리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함께 갈 수 있는 “우리”의 역할을 필요로 한다. 황망하게 떠나보낸 소중한 목숨들이 안타까워 숨죽여 또는 목놓아 우는 2014년, 이런 “우리”의 역할은 어느 한 나라를 넘어 지구 공동체의 몫이다.
※저자는 “Aboriginal”을 원주민이 아닌 고유주민으로 번역했다. 이는 원주민이라는 단어가 가질 수 있는 적절하지 않은 의미를 피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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