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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 장애인 이야기-남경욱] 순리와 자기결정에 대한 고민, 영화 '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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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기간 (사업내용 개발 후 작업 예정)
등록일 2020-07-16 오전 10:21:15

순리와 자기결정에 대한 고민, 영화 ‘청원’

 

남경욱

단국대학교 특수교육연구소 / 교육학박사

 

 ‘평양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만약 하기 싫은데도 강요에 의해 그 직분을 수행해야 한다면 개인적으로 불행할 일이 될 것이다. 반대로, 대신할 사람이 없는데도 그 직분을 포기한 사람이 있다면 무책임하다고 비난받아야 할까? 우리는 살면서 이런 류의 크고 작은 고민거리들을 제법 많이 경험한다. 현재 만족스럽지 못해도 생계를 위해 버티고 있는 직장생활, 못마땅한 사람들과도 어쩔 수 없이 어울려 지내는 일 등이 다반사이지 완전히 만족하고 사는 경우를 찾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다. 대단히 결단력있는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그냥 견디면서 살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책임감을 미화하기도 하고 이런 저런 숭고한 가치를 나열하면서 그러지 않기로 결단한 사람들을 비난하기도 한다.

 

하물며 인류가 가진 수많은 가치들 중 불가침에 속하는 최상의 영역인 ‘인간의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 이것은 철학적이거나 감상적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40명 이상이 자살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번에 소개하는 영화 ‘청원’은 아직은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오는 인도영화이다. 그러나 감독 산제이 릴라 반살리의 전작 ‘블랙’을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정상의 마술사로 군림하던 주인공 이튼은 14년 전 어느 날 동료의 시기심에 의해 공연 도중 척수손상을 입게 된다. 목 아래 전신이 마비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튼은 지난 세월 동안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 집필과 강연, 그리고 라디오진행까지 하면서 대중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또한 이튼의 옆에는 헌신적인 간호사 소피아가 12년째 그의 손발이 되어주고 있다.

 

청원 영화이미지1 간호사 소피아가 전신마비가 된 주인공 이튼의 머리를 감겨주고 있다

<간호사 소피아가 전신마비가 된 주인공 이튼의 머리를 감겨주고 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변호사인 친구를 집으로 불러 자신을 안락사시켜 줄 것을 정부에 청원해 달라고 부탁한다.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야하고 회복가능성이 없음을 아는 이튼은 고통의 종지부를 찍고 싶지만 혼자 힘으로는 콧잔등 위의 파리도 좇을 수 없기에 죽는 일에 타인의 도움이 필요했고 그것은 위법이 되기에 정부에 청원을 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그간 이튼을 알아왔던 다수의 대중은 배신감을 느끼고 이튼을 비난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이튼의 고통을 대신해주거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청원 영화 이미지2 안락사 청원을 부탁받은 친구는 처음에 외면하고 돌아선다

 

 

 

 

 

 

 

 

 

 

 

 

 

 

<안락사 청원을 부탁받은 친구는 처음에 외면하고 돌아선다>

 

사실 우리는 중증장애인의 삶에 대해 잘 모른다. 필자의 경우 휠체어 장애인의 신체사이즈를 측정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중증 장애인 수 백여 명을 가까이서 접할 기회가 있었다. 제각기 다양한 어려움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고로 장애를 입은 몇몇은 이튼과 마찬가지로 소변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여름이라 불쾌한 냄새가 새나왔다. 한 뇌성마비 아동은 자기 의지로 근육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필자를 치기도 했고 심지어 침을 뱉기도 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단어 한 마디를 구사하는데도,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는데도 큰 어려움을 보였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이가 있다. 온 몸에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혹(종양)을 가진 30대 여성인데 이미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등에 위치한 혹은 축구공 정도 크기였다. 그 분을 만났던 날 그 분 모습이 계속 어른거려 꽤나 마음이 무거웠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일반인들은 그런 식으로 스쳐 지나가면 그런 공감이나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 일상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 분들은 그럴 수 없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그들을 완전히 공감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 정부 측 검사가 이튼의 고통스런 날들을 공감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안락사 찬반논쟁 그리고 이와 관련한 인간의 존엄성, 생명윤리, 인도주의, 종교적 시각 등 거창한 테마들에 대해 감히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참고로, 안락사(Euthanasia)를 인정하는 국가라 할지라도 그 요건은 매우 까다롭다. 이튼의 경우 안락사라기보다는 자살보조를 청원했다고 보는 편이 더 합당할 것이다).

 

청원 영화 이미지3 법정에서 이튼의 증언을 연기한 판사에게 소피아가 부당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법정에서 이튼의 증언을 연기한 판사에게 소피아가 부당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도중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이 건강한 학생들이 이튼처럼 사지마비를 겪게 된다면 지금의 꿈들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을까? 이성과 사귀어보겠다는 용기는 계속 품을 수 있을까? 여간 담대한 성품과 의지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어려울 것이다.

 

영화에서는 결국 법원에서 이튼의 청원이 거부되고 이튼을 사랑한 간호사 소피아가 법적 처벌을 각오하면서 이튼의 고통을 마감시켜주기로 한다. 이 행동에 대해서는 수강생들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안락사시킬 수 있다고 대답했던 몇몇 학생들이 수 년의 수감생활을 전제로 한 소피아의 행위를 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선뜻 나서지 못했다. 덧붙여 혼자 생각해 본 것은 내가 이튼이라면 나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사랑하는 이가 그런 형벌을 받도록 할 수 있을까 하는 정도였다.

 

영화 청원 이미지4 안락사 청원이 기각된 것은 이튼에게 종신형이 선고된 것과 다름없었다

 

 

 

 

 

 

 

 

 

 

 

 

<안락사 청원이 기각된 것은 이튼에게 종신형이 선고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아쉬운 점을 든다면 소재가 지니는 무게감에도 불구하고 조금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요소들이 있다는 것이다. 아직 인도영화가 낯설기 때문인지 이튼의 표정연기와 대사는 영화보다는 과장스런 연극에 더 어울릴 듯 싶고, 소피아가 식당에서 갑자기 춤을 추는 장면은 보는 이의 손발을 오글거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런 아쉬움들은 취향의 차이라 해두고 넘어가 보자.

 

 

오히려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은 이유가 되는 장면 한 가지를 귀뜸해주고 싶다.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이튼의 마지막 이별파티이다. 보통의 경우 죽음 앞에서 그렇게 담대하거나 기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이튼의 경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그런 일종의 의식이 좋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튼은 매우 유쾌하게 고통의 종말을 축하하면서 모든 이들에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라고 당부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다.

 

영화 청원 이미지5 이튼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마지막 이별파티를 즐기고 있다

<이튼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마지막 이별파티를 즐기고 있다>

 

이 영화를 보실 분들에게 함께 보면 좋을 영화 한 편을 추천해주고 싶다. 작년에 세상을 뜬 사망시술 전문의 잭 케보키언(Jack Kevorkian)의 투쟁을 조명한 알 파치노 주연의 ‘유 돈 노우 잭(You don't know Jack)’이다. 실제로 케보키언 박사는 인도주의에 입각해 자신이 고안한 장치로 환자 130명의 안락사 혹은 자살을 도왔고 8년이 넘는 수형생활을 한 화제의 인물이다. 영화 속 케보키언의 주장을 들으면 꽤 흥미로워진다. 심장이식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에 사람들은 자연의 순리, 혹은 신의 섭리에 어긋난다 해서 반대했고, 수면제인 에테르가 16세기에 발견되었음에도 신의 뜻에 따라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이유로 19세기에 와서야 수술에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이제껏 인류가 품어왔던 죽음에 대한 시각과 윤리에도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을지 적잖은 염려를 하게 된다. 과연 무엇이 순리이고 이에 대한 인간의 자기결정은 어디까지 이르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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