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왼쪽메뉴 바로가기
본문영역 바로가기
하단영역 바로가기

자료실

파라다이스 복지재단의 과거사업에 대해 만나보세요.

게시판
[영화속 장애인 이야기-남경욱] 노인 마루게(Maruge)를 통해 본 인간 존엄성의 일면
사업영역 [활성] 장애인식개선사업 > [활성] 칼럼/에세이
사업기간 (사업내용 개발 후 작업 예정)
등록일 2020-07-16 오전 10:21:40

노인 마루게(Maruge)를 통해 본 인간 존엄성의 일면

 

남경욱

단국대학교 특수교육연구소 / 교육학박사

 

 지난 두 편의 칼럼에서 소개한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전신이 마비된 중증의 장애인들이었다. 이번엔 분위기를 좀 바꿔서 최고령 초등학교 입학생으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린 실존인물의 이야기를 소개하려 한다. 혹시 [영화 속 장애인 이야기]칼럼에서 왜 장애인이 아닌 노인의 얘기를 하냐고 묻는다면 장애(인)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고 말하고 싶다..

 

정부의 무상교육 발표 후 어린이들이 학교에 몰려와 입학을 신청하고 있다.

 

장애란 무엇인가? 장애인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우리가 대학에서 그리고 법조문을 통해 알고 있는 정의들은 대부분 WHO의 의료적 모델에 입각한 것들이다. 이 모델에 의하면, 장애는 ‘개인의 손상(impairment)이 기능제약과 사회적 불리를 가져온 상태 혹은 그러한 상태에 처한 자’를 의미한다.

 

 

처음에 입학을 거부당했던 마루게는 공책과 교복을 준비한 후 재차 학교의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장애학을 연구하는 진보적 학자들 그리고 장애인의 권리쟁취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현장 운동가들은 상당히 다른 관점으로 장애를 파악한다. 그들은 장애의 원인을 개인의 책임이 아닌 사회적 맥락에 두고 있다. 즉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 손상, 기능상실, 질병 등이 ‘사회적 태도나 문화적, 물리적 장벽으로 인하여’ 일상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가져오는 상태가 장애라는 것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이 영화 ‘퍼스트 그레이더(The First Grader)’의 주인공인 아프리카 케냐의 키마니 낭아 마루게(Kimani Ng'ang'a Maruge)는 근본원인은 다를지라도 동일한 사회적 장벽으로 인해 장애인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 일어난 1950년대 이후 장애인 인권 관련 운동이 비단 장애인들만의 것이 아니라 여성, 흑인 등 힘없는 소수자(Minority) 운동의 한 부분이었음을 생각해보면 동일한 맥락이라 하겠다.

 

 

어린 아동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있는 마루게. 영국의 식민지 시절 당했던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다.

 

 

온갖 고초를 겪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사랑했던 가족도 모두 잃고 이제는 가난하고 초라하게 늙어버린 까막눈 노인. 그는 마치 영국의 산업화 시기에 낙오된 사람들을 수용했던 구빈원(Workhouse)에서 ‘노동이 불가능한 자’들을 선별하여 ‘장애인(Disabled People)’이란 명칭으로 분류함으로써 시작된 장애인이라는 개념의 탄생과정과 유사한 과정을 거친 것이다. 마루게가 식민지 케냐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10여 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아마도 사회의 정상분포곡선에서 중간 정도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찬가지로 장애인들도 산업화 과정에서 손상의 속성은 예전과 다름없었는데도 새로 재편된 산업구조 속에서 노동자로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재화와 서비스 생산 그리고 그 분배에서 정당하게, 체계적으로 그리고 매우 효율적으로 소외된 것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영국의 신민통치에 저항했던 마루게는 아내와 자식이 총살당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서두가 길었는데 이 영화, 아니 이 실화의 중요한 대목은 지금부터이다. 내 자신이 마루게라면 그런 여건에서 과연 학교 문을 두드릴 생각을 했을까? 영화에서 동네 노인들이 놀려대던 것처럼 나 역시 ‘편하게 여생을 보내는 게 낫지, 다 늙어서 뭐하는 짓인가?’, 혹은 한층 전략적(?)으로 ‘지금 배워서 어디다 써먹게?’ 하는 생각이 앞섰을 것 같다. 꽤나 현실적이고 현명한 생각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생각해보자. 혹시 이런 생각의 뿌리가 우리나라 국민의 교육을 주관하는 정부부처의 이름을 ‘교육인적자원부’라고 불렀던 시대의 이유와 서로 맞닿아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제인 선생님이 마루게의 편지를 펼쳐보고 있다. 그것은 마루게의 독립운동에 대한 케냐 대통령의 감사편지이다.

 

 

우리는 ‘교육가능급’조차 안 되는 아동들이라 해도 지속적으로 교육과 훈련을 통해 그들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그래, 아동은 살 날이 많고 주변인들에게도 수고를 좀 덜 수 있으니 그렇다 치자, 그럼 생의 마감을 목전에 둔 마루게는? 영화 초반부터 등장하는 그 중요한 편지를 읽어보고자 하는 마루게의 실용적 목적 또한 배움의 원동력이 되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학교에 들어 간 이유의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 보아야 할 것 같다. 배운다는 것, 교육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왜 우리는 교육받을 권리를 인간의 기본권으로 보고 있는가? 교육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온 장애인들의 교육권 쟁취투쟁이 과연 생계와 출세의 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하는 실용적, 전략적 접근인가?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학업에 열중하고 있는 마루게의 실제 모습

 

해답은 행위 그 자체에 있지 않을까? 배움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편하고자 하는 동물의 본능에 반해서 책과 연필을 쥐고 씨름하는 그 모습은 문명세계에 사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 아니던가? 현재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 대다수는 이 권리를 너무 쉽게 건네받아서 그 존귀함에 대한 목마름의 기억이 덜 할 뿐이다. 84세의 마루게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건 젊은 시절 사회에서 박탈당했던 자신의 권리를 되찾는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높이고자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라고 생각하니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2005년 UN은 마루게를 초청하여 무상초등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전세계인 앞에서 연설하도록 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가 사망하기 4년 전 일이다.

 

영화를 보고 나자 지난 해 국내에 소개된 한 권의 책 제목이 떠올랐다. 그 책의 제목으로 글을 마치려 한다.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아라>.

자료실 목록
패밀리 사이트 보기